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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문자왕] 금강사 창건 및 불교 장려 등 고구려 전성기를 이끈 왕

[한국사-문자왕] 금강사 창건 및 불교 장려 등 고구려 전성기를 이끈 왕

 

 


1. 생애: 생년 미상~519년


2. 재위기간: 491년~519년


3. 휘: 고나운


4. 묘호: 문자명왕, 시호: 명치호앙, 문자왕 연호: 백선, 곡산군, 경  


5. 신상정보

 

[문자왕이 차건한 금강사 터(현 청임리사)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491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고조다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2남


6.출생 및 즉위 과정
1)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손자이며 고추대가 고조다의 아들로 탄생.
2) 아버지 고조다가 일찍 었기에 491년 할아버지 장수왕이 승하한 뒤 고구려 21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금강사 창건 및 불교 장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자명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498년에 금강사를 창건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정신적 기반 확립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2) 중국 남·북조 외교정책
대외 관계에서는 전대의 외교정책에 따라 중국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해 국제 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였다.
즉, 문자왕은 즉위와 더불어 북위로부터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낭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책봉과 함께 고구려에 친조나 왕자의 입조를 요구한 북위의 요구에 대해 고구려가 거절함으로써 양국 간의 이면적인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양국은 상호 경계와 견제를 지속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른바 조공을 통한 화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3) 부여왕의 투항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당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여 복속시켰다.


4) 신라 및 백제와 전쟁
백제와 신라를 침공해 497년 신라의 우산성, 512년 백제의 가불성 및 원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나·제 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 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495년: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하에서 패하였다.
497년: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503년: 백제의 달솔 우영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을 침범하였으나 막아내었다.
506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자 회군하였다.
507년: 고로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9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가불·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백제군이 용감한 기병 3천으로 반격하였고 고구려는 백제왕군의 수가 적음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진영을 만들지도 않다가 대파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