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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장수왕] 평양천도 및 남진정책으로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왕, 장수왕 일대기

[한국사-장수왕] 평양천도 및 남진정책으로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왕, 장수왕 일대기


1. 생애: 394~491년


2. 재위기간: 412년~491년


3. 휘: 고거련


4. 묘호: 장수왕, 시호: 장수왕, 강왕, 연호: 연가, 연수, 건흥 


5. 신상정보

[EBSi 5분사탐한국사-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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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역사스페셜-장수왕]
[KBS1 역사저널-장수왕]
[KBS1 역사저널-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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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장수왕]
[장수왕 집권 당시 고구려 영토]

출생일: 394년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491년
매장지: 장군총(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 용산) 혹은 전동명왕릉(평양 부근) 두 가지 견해 대립 중
부친: 광개토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1남1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394년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남.
2) 409년 태자로 책봉됨.
3) 412년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고구려 20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중국 외교 정책
장수왕은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중국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439년 북위에 의해 통일되었고, 남중국은 한족에 의해 동진·송·남제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해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이후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의 왕 풍홍이 고구려 망명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 소환 요청을 거절하고, 466년 북위의 혼인 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 여부에 따라 외교 관계를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북위와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2) 광개토왕릉비 건립
장수왕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였다.


3) 평양성 수도 천도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는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평양 천도를 계기로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4) 백제 정벌 남진 정책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안정된 가운데 장수왕은 백제를 정벌하는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454년부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455년 백제의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475년에는 승려 도림을 이용해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의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백제 및 백제와 교류하는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5) 신라 남진 정책(중원고구려비)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해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481년에는 호명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6) 고구려 최대 영토
장수왕의 남진 정책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아산만·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밖에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 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7) 최장수 왕
394년 출생하여 491년 사망할 때까지 98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붙었다.
장수왕이 491년에 98세로 죽자, 북위는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서, 장수왕에 대한 북위의 평가를 짐작하게 한다.


8) 무덤에 대한 의혹
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장군총이 그의 무덤이라는 견해와,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전동명왕릉이 그의 무덤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