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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광개토대왕] 거란/숙신 정벌, 백제/후연을 장악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인 호태왕

[한국사-광개토대왕] 거란/숙신 정벌, 백제/후연을 장악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인 호태왕

 

 


1. 생애: 374~412년


2. 재위 기간: 391년~412년


3. 휘: 고담덕


4. 묘호: 없음, 시호: 국각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5. 신상정보

 

[KBS1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광개토대왕]
[KBS1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광개토대왕]
[KBS1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광개토대왕]
[KBS1 역사스페셜-광개토대왕 정복활동 지도]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광개토대왕]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광개토대왕]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광개토대왕]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광개토대왕]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광개토대왕 무덤]

 

출생일: 384년
출생지: 국내성 이련의 잠저
사망일: 391년
매장지: 중국 길림성 집안현(능에 대하여 장군총설과 태왕릉설이 갈려져 있다)
부친: 고국양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2남


6.출생 및 즉위 과정
1) 374년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남.
2) 386년 태자로 책봉됨.
3) 391년 아버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함. (<삼국사기>에는 392년 즉위로 기록됨)


7. 주요 업적 및 삶

1) 정복 사업
광개토대왕은 재위 기간 중 64성과 1,400 촌락을 공파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에서 영안, 동으로는 혼춘,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게 했다.


2) 백제와의 전쟁
392년 7월: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해서 석현성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392년 8월: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해 오자,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392년 10월: 백제 북방의 천혜의 요새이자 중요지인 관미성을 20일에 걸친 포위 끝에 쳐서 함락시켰다.
393년 8월: 백제는 아신왕이 즉위하면서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에서 격퇴하였다.

394년: 고구려는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5년: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396년: 고구려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대전과를 올렸다.
404년: 백제는 왜와 결탁하여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를 침공해 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병력 5만을 파견하여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다.
407년: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


3) 신라와의 친선관계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다.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남방으로의 세력 확장과 함께 서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기도 했다.


4) 후연과의 전쟁
396년: 모용보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에 책봉하는가하면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400년: 후연왕 모용성이 소자하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 옴으로써 양국 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402년: 요하를 건너 멀리 평주의 중심지인 숙군성을 공격, 평주자사 모용귀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요동성을 비롯한 요하 이동 지역을 차지하였다.
405년: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요하 이동 지역에 대한 장악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된다.


5) 거란 정벌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00인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빼앗긴 고구려인 1만 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를 친정하여 염수 방면의 부락 600∼700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여 개선했다.


6) 숙신 정벌
398년에는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숙신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었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친정하여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7) 내정의 정비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사마·참군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의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 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