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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정조] 규장각과 장용영 설치 등 유네스코가 인정한 왕, 정조 이산의 업적

 

[한국사-정조] 규장각과 장용영 설치 등 유네스코가 인정한 왕, 정조 이산의 업적

 

1. 생애: 1751년~1800년


2. 재위 기간: 1776년 ~ 1800년


3. 휘: 이산


4. 묘호: 정조


5. 신상정보

[MBC 드라마 이산-정조]
[영화 역린-정조]
[KBS2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정조]
[채널CGV 드라마 정조암살미스터리:8일-정조]

출생일: 1752년 10월 28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일: 1800년 8월 18일 (45세)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부친: 장조(사도세자)
모친: 한경왕후 홍씨
배우자: 효의왕후
자녀: 4명 (2남 2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1752년 10월 28일 창경궁에서 조선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차남으로 탄생.
2) 형인 의소세자가 3살 당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이 됨.
3)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죽은 후 세손의 지위를 함께 잃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외가에서 생활.
4) 후계자가 없던 영조는 '이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계승시키고 1775년부터 1776년까지 대리청정을 통한 후계자 수업을 받음.
5)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


7. 주요 업적 및 삶

 

1) 아동정책
정조는 아이들에 대한 정책을 제시하였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들을 임금을 대하듯이 우러 보아야 하며 이는 아이들이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 이 말을 남겼다. 또한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심지어 엎드려 절까지 했다고 한다.


2)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1777년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다. 당시 홍국영이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특별 승진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도승지'로 올리고, 다시 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숙위대장'에 임명하였다.
전례가 없는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강력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이러한 홍국영의 몰락은 왕비 독살설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본적 원인은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 외척이 된 것을 들 수있다.


3)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식을 연 바로 그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다.
정조는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승하고 생부인 장조의 존호를 장헌으로 추승하였다.
이러한 홍국영의 몰락에 대하여 직접적인 원인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표적으로 왕비 독살설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번적인 원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 정조의 탕평책
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 이어갔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책'을 실행하였다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탕평책'을 시행하였다.


5) 규장각 설치
정조는 즉위 후 창덕국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이를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왕권강화을 위한 일환 중 하나이다.
규장각에 두 명의 제학과 두명의 직제학을 두었는데 네 사람 모두 '시파'로 정조의 정책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을 관여 게 한 점으로 보아 규장각 설치가 처음부터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6) 초계문신제 실시
37세 이하의 참상.참하의 당하관 중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초선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 양성의 장치를 강구한 것이 '초계문신'제도이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상기 초계문신제를 수료한 사람이 모두 138명에 이른다.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약용, 정약전 헹제와 체재공의 아들인 채홍원이 있다.


7) 장용영 설치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1785년에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를 창설하였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두어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체제로 만들었다.
그 뒤 1793년 그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키니, 이것이 곧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8) 일성록
일성록은 1760년 영조 때부터 국정에 대한 제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왕실 일기이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자신의 언행과 학문을 기록한 <존현각일기>는 정조 자신이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책은 1783년부터 국왕의 개인 일기에서 규장각 관원들이 시정에 관한 내용을 작성한 후에 왕의 재가를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되었다.
상기 일성록은 201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계가 인정한 보물이 되었다.


9) 신해통공
1791년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의 건의로 신행된 '통공발매정책'이다.
즉 조선 후기의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비시전계 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한 상업 정책이다.
이로써 전통적인 육의전 상인을 제외한 일반 시전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은 혁파되었고 도시 내의 일반 상인들은 금난전권의 저촉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0) 담배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 1616~1617년 사이에 조선으로 들어와 급속히 퍼졌다. 당시 조선인들은 담배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서로 팔고 사는 일이 널리 행해졌다.
그중 정조는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에서 담배에 대한 가장 큰 예찬을 보였다. 당시 과거 문제에 정조가 직접 담배를 논술문제로 내었다고 하니 그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11) 수원화성
1789년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개명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명했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1793년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1796년 완성을 보았다.
상기 '화성' 축성은 정조의 개혁적 정치노선과 당시 실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사상 및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낸 근대적 생산방식에 의한 건축공사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계기로 한국 근대건축이 시작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2) 대전통편 간행 사업
<대전통편>은 1785년 발간된 법전으로 정조는 대전통편의 편찬에 관심을 기울이고 직접 편찬 사업에 관여, 보고를 받았다.
조선의 법제는 <경국대전> 이후 <대전속록> 이나 <경국대전주해>을 기반으로 정비되어 오다가, 영조 때 다시 탕평책 추진의 일환으로 <속대전>을 만들었다.
정조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한하여 <대전통편>을 만들었고 상기 대전통편은 1865년 <대전회통>이 발간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