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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영조] 사도세자를 죽이고 강력한 탕평책을 강행한 철의 군주, 영조의 업적

 

[한국사-영조] 사도세자를 죽이고 강력한 탕평책을 강행한 철의 군주, 영조의 업적

 

1. 생애: 1694년~1776년


2. 재위 기간: 1720년 ~ 1724년


3. 휘: 이금


4. 묘호: 영조


5. 신상정보

[MBC 드라마 이산-영조]
[SBS 드라마 대박-영조]
[SBS 드라마 해치-영조]
[영화 사도-영조]

출생일: 1688년 11월 20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사망일: 1724년 10월 11일 (35세)
매장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부친: 숙종
모친: 희빈 장씨
배우자: 단의왕후, 선의왕후
자녀: 9명 (2남 7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1694년 10월 31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화경숙빈 최씨의 차남으로 탄생.
2) 1699년 연잉군으로 책봉.
3) 유년시절 사저에서 지내다 입궁하였으며, 1704년 사릉참봉 서종제의 딸 달성군부인 서씨와 가례를 올린 뒤 다시 출궁.
4) 경종에게 자식이 없고 경종에게 가장 가까운 혈족이 연잉군뿐이었기에 1721 왕세자로 책봉.
5) 1724년 음력 8월 경종이 갑작스럽게 승하 하자 왕위를 물려받고 조선의 제21대 왕으로 즉위.


7. 주요 업적 및 삶

 

1) 탕평책
영조는 노론이 자신을 추대한 것을 잊지 않고, 목효룡 사건 관련자들, 노론 4 대신의 사면 복권과 그 후손, 관련자들을 등용한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가짜 군주라고 조롱하는 답안지가 발견되어 1748년, 1755년 소론 강경파에 대한 대 대척 처벌과 유배형을 내린다.
초기 영조는 노론을 중용했지만 '탕평책'을 써서 소론 대신, 관료들을 적극 등용했다. 한편으로 노론 강경파와 외척을 견제하려 했고, 원칙과 현실을 중용하였다.
또한 상기 '탕평책'의 일환으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 사우의 사건 또는 사향을 금지시키면서 1741년에는 이를 어긴 170여 개소의 서원. 사우에 대한 훼철을 강행함으로써 서원남설에 철퇴를 가했다.
그리고 1772년 과거시험에 '탕평과'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 해에는 '동색금혼패'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2) 이인좌의 난
1728년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가 충청북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거병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였으며,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다.


3) 나주괘서사건
1755년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이다. 전남 나주에서 소론인 '윤지'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나라를 비방하는 벽서를 붙였고 윤지는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영조는 본인이 왕세제 책봉된 것과 형인 경종이 사망한 것이 관련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천의소감>의 저술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4) 김춘택 아들 음모론
일부 야사에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고 '김춘택'의 아들로 추정되고 있다. 결정적인 근거로 영조의 외모가 숙종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실제 18세기 조선에서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과 남인 강경파 중에는 '영조 김춘택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상기 음모론으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라는 내용으로 1728년 3월 15일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5) 민생대책
1725년 영조는 '압술형'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으며,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형살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1774년 사문의 용형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남형과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6) 금주령
금주령은 조선시대 큰 가뭄이 들거나 흉작. 기근이 있을 경우 국가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다.
금주령을 시행하는 이유는 귀한 쌀로 술을 만들기 때문이다.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금주령을 내렸고 이를 어긴 관리에게 사형까지 이르는 엄벌을 내렸다.


7) 균역법 제정
'균역법'은 조선시대 군역의 부담을 경함 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으로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의 부활이다.
단순한 감필이 아니라 모두 1 필역으로 부담을 균일하게 함으로써 양역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그리고 감필로 인한 재정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전을 토지세에 덧붙여서 양반이 위주인 지주층의 부담을 끌어내고,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피역자에게 선무군관이란 명칭을 부여하여 군관포를 징수하였다.


8) 오가작통법 부활
'오가작통법'은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한통으로 묶은 행정 차치 조직이다.
최초 세종대왕 때부터 시행되었으며 영조 때 다시 부활하여 조세수입을 늘리는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9) 서적 집필 및 인쇄술 개량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여 민중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퇴도언행록>, <어제여사서>, <육전>, <소학훈의>,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 , <속병장도설>, <여지도서>, <둥국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 등 많은 서적을 편찬했으며 <악학궤범>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이기도 하다.


10) 사도세자사건(임오화변)
1762년 4월 '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사망한 사건이다.
상기 사건은 노소당인들의 정쟁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권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세자의 실덕과 비행의 고발 등 이간책 등에 의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11) 대리청정
1725년 훗날 정조가 될 손자 이산이 태어났다. 같은 해 영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석에 높게 되고 '사도세자'에게 시험 삼아 명을 내려 '대리청정'을 하게 만들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조정에 등용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소론 온건파 처벌, 추탈을 요구했지만 세자는 이를 거절했고,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고해바쳤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후에 '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사망하는 사건에 이르게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