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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숙종]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으로 탕평책을 조성한 왕, 숙종의 업적

 

[한국사-숙종]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으로 탕평책을 조성한 왕, 숙종의 업적

 

1. 생애: 1661년~1720년


2. 재위기간: 1674년 ~ 1720년


3. 휘: 이순


4. 묘호: 숙종


5. 신상정보

[MBC 드라마 동이-숙종]
[KBS2 드라마 장희빈-숙종]
[SBS 드라마 장옥정,사랑에 살다-숙종]
[SBS 드라마 대박-숙종]

출생일: 1661년 10월 7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
사망일: 1720년 7월 12일 (58세)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부친: 현종
모친: 명성왕후
배우자: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자녀: 8명(6남 2녀)


6.출생 및 즉위 과정

 

1) 1661년 조선 제18대 왕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남.
2) 숙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했기에 모후 명성왕후는 그가 일찍 죽을까 염려되어 1667년 6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함.
3) 1674년 아버지인 현종이 승하하고 음력 8월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탕평책
조선 후기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이다.
상기 '탕평'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년(숙종 9년) 박세채다. 그는 1694년 영의정 당시 또 다시 탕평을 제기하였다. 그 뒤 소론의 재상 최석정이 한때 남인들을 조정에서 등용시키려는 구실로 탕평책을 표방했고, 또 숙종 자신도 비망기를 통해 여려 차례 탕평을 펼쳐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숙종의 탕평책은 구호에만 그쳤기에 정치적 기반은 조성되지 못하였다.


2) 장희빈
장희빈의 본관은 인동이다. 역관의 딸로 어머니의 정부였던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이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1688년 왕자 이윤(경종)을낳고 1689년 남인의 원조를 얻어 이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3) 경신환국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으로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한다.
1674년 '갑인예송'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들이 역모죄(허적의 아들 허견)로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4) 기사환국
1689년(숙종 15년) 장희빈의 소생을 정호로 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정국을 장악한 사건이다.
당시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문제에서 반대론을 제기한 송시열 이하 서인세력이 대거 축출되었다.


5) 갑술환국
1694(숙종 20년)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나민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정국이다.
폐비 사건을 차츰 후회하고 있는 숙종의 마음을 눈치챈 서인 서력이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하고 폐비였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장희빈은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내려왔다.


6) 백두산정계비
1685년(숙종 11년)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에서 조선 채삼인들의 습격을 받아 외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과 청국 사이에 국격성을 표시하기 위해 2,200m 고지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7) 북벌론
숙종 즉위 초에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간을 부활시키고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만8천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8) 5군영 완성
숙종과 서인 정권은 남인이 장악했던 훈련별대를 청초군과 통합하여 금위영으로 발족시켜 1682년 '5군영'제를 완성했다.


9) 안용복
1696년(숙종 22년) 수군 출신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쫒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천명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했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방정책을 강화하면서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10) 장길산
1697년(숙종 23년)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용해 오던 장길산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매우 어수선했다.
서울에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무리와 결합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11) 편찬 사업
<선원록>, <대명집례> 간행과<북관지>, <열조수교>,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 귀중한 서적이 편찬되었다.


12) 상업활동
상업활동 지원을 위해 주전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호조.공조 및 훈련도감.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전라.경상 감영에서 상평통보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