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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인조] 친명배금 정책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맞본 임금, 인조의 업적

 

[한국사-인조] 친명배금 정책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맞본 임금, 인조의 업적

 

1.생애: 1595년~1649년


2. 재위 기간: 1623년 ~ 16249년


3. 휘: 이종


4. 묘호: 인조


5. 신상정보

 

[MBC 드라마 화정-인조]
[JTBC 드라마 꽃들의전쟁-인조]
[tvN드라마 삼총사-인조]
[영화 남한산성-인조]

 

출생일: 1595년 12월 7일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 정원군 잠저
사망일: 1649년 6월 17일 (53세)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부친: 정원군
모친: 연주군부인
배우자: 인렬 왕후, 장렬왕후
자녀: 7명(6남 1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1595년 조선 제14대 왕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과 연주군부인 사이에서 태어남.
2) 정원군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왕위에 오로기 전 이름은 '능양군'
3)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과 인조는 숙부와 조카 사이지만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조선의 제16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인조반정
'광해군'이 왕위에 있을 당시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가둔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정원군'(인조)의 가족이 살던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린다.
1623년(광해군 15년) 서인의 김류. 이귀. 이괄. 최명길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원군'을 조선의 제16대 왕(인조)으로 추대하고 서인계 중심으로 정권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인조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 근거자료는 인조시대 때 작성된 '광해군 실록'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 시대에 작성된 '인조실록'이 그 근거이기에 이는 인조가 자신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 친명배금 정책
인조 때 명나라를 중시하고 청나라를 멸시한 정책이다. 당시 명나라는 기울어가고 후금의 세력은 계속 커져가는 상태였으나 인조와 서인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하였다.
상기 외교정책은 후금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되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다.


3) 북인 숙청과 이괄의 난
1623년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및 하옥시키는 등 광해군과 관련된 북인계 인사들을 정리한다.
1624년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이를 피하기 위해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을 간다.
상기 '이괄의 난'은 이괄의 부하였던 기익헌, 이수백의 배신으로 끝이 나며 일부 부하들은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기는데 이는 향후 '정묘호란'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4) 정묘호란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는 '후금'은 이괄의 잔당 세력이 조선 침략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고, 1627년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함으로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조선은 후퇴를 거듭하였기에 인조 이하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하였다. 결국 인조는 1627년 후금과 '정묘조약'을 맺음으로써 오랑캐로 여기던 후금과 화친을 맺는다.


5) 병자호란
1632년 후금은 조선에게 양국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변경할 것을 명한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오랑캐에 대적하자는 '척화론자'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화론자' 두 파로 나뉘게 되었고 인조와 조정은 '척화론자'의 입장을 선택하였다.
결국 1637년 후금은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면서 조선을 완전히 박살 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을 일으켰다.


6) 삼전도의 굴욕
청나라 군대는 퇴각을 중단하고 계속 조선의 왕에게 황복을 권고했으며 결국 59일간의 항전은 인조의 항복으로 끝이 난다.
당시 성문을 나선 인조가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앞에 무릎을 꿇고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으로 그렇게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했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용'이라고 오늘날 부르고 있다.
인조의 항복과 함께 당시 장남과 차 님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끌려가고, 조선의 아녀자들이 청나라에 함께 끌려갔다.


7)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두 번의 호란으로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사 정책과 경제 정책을 강행했다.
남한산성의 수비 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 조선 후기 '5 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1634년 삼남지방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그리고 '상평통보'의 주조 및 그 유통을 시험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이는 효종 때 이후 조선 화폐 유통의 기초를 다진 업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