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한국사

[한국사-효종] 어영청을 강화하여 북벌 운동을 준비한 군주, 효종의 업적

 

 

[한국사-효종] 어영청을 강화하여 북벌 운동을 준비한 군주, 효종의 업적

 

1. 생애: 1619년~1659년


2. 재위기간: 1649년 ~ 1659년


3. 휘: 이호


4. 묘호: 효종


5. 신상정

 

[JTBC 드라마 꽃들의전쟁-효종]
[MBC 드라마 화정-효종]
[MBC 드라마 화정-효종]
[KBS2 드라마 추노-효종]

출생일: 1619년 7월 3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본궁
사망일: 1659년 6월 23일 (39세)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부친: 인조
모친: 인렬왕후
배우자: 인선왕후
자녀: 8명(왕자 1명, 공주 7명)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1619년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인영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남.
2) 병자호란 이후 1637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감.
3) 1645년 조선으로 귀국함과 동시에 형인 소현세자가 돌연 사망하여 세자로 책봉.
4) 1647년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고, 1649년 5월 인조가 사망하면서 조선의 제17대 왕으로 즉위.


7. 주요 업적 및 삶

 

1) 북벌 운동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 등 친청파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계 대청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을 추진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은 군부국인 명에 대한 신자국의 당연한 의무라는 복수 설치의 논리로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1651년(효종 2년)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북벌 계획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 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다.


2) 어영청 강화
'어영청'은 조선 후기 중에 설치된 오군영 중 왕을 호위하던 군영이다. 효종은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대적으로 개편. 강화했으며, 금군의 기병으로 전환, 모든 금군의 내삼청 통합, '수어청'의 재강화 등 제반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 강화책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금군의 군액을 1,000,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시키고자 했다.
어영군은 많은 군사를 확보하고 3명의 보인제를 통하여 재정적인 난점을 극복함으로써 군사 증강에 성공했으나, 훈련도감은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실패했다.


3) 하멜표류기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다. 하멜은 효정을 알연하여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오히려 포를 다루는 포수의 경험 때문에 신무기 개발을 지원하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당시 조선은 북벌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문물과 지식이 무기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1666년 조선 표류 생활 끝에 탈출해 1668년 본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했으며 그해 <하멜표류기>라는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상기 기행문은 한국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역. 교육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4) 나선정벌
'나선정벌'은 효정 때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공격한 싸움이다.
청나라는 러시와의 충돌로 조선의 군사를 요청하였고, 1654년 2월에 청나라 사신 한거원을 보내어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횡령을 경유,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영의정 정태화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 병마우후 변금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기고수 등 50여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1차, 2차에 걸친 나선정벌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몰래 키운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돕도록 만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