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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개로왕]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 일대를 빼앗기고 살해당한 왕

[한국사-개로왕]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 일대를 빼앗기고 살해당한 왕

 

 

1. 생애: 생년 미상~475년


2. 재위 기간: 455년~475년


3. 휘: 부여경사(부여경)


4. 묘호: '없음'


5. 신상정보

 

[KBS1 한국사기-개로왕]
[MBC 드라마 제왕의딸 수백향-개로왕]
[MBC 드라마 제왕의딸 수백향-개로왕]

 

 

[KBS2 전설의고향-개로왕]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개로왕]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475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비유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확인불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출생은 생년 미상으로 확인불가.
2) 백제 20대 왕 비유왕의 장남으로 부왕 사후 백제 21대 왕으로 즉위함.
3) 이름은 '여경' 또는 '경사', 또는 '근개루왕'이라고도 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북위에 구원병 파견 요청
472년 북위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해야 하는 이유와 성공 가능성을 보고하며 설득하였다.
하지만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동북아시아의 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고구려를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개로왕의 외교는 실패로 끝난다.


2) 내정 실패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무참히 짓밟힌 중요 원인 중 하나는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해 왕족 중심의 집권 체제를 만들었다.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에 는 그의 두 아들 '여도'와 '여곤'을 비롯해 8명이 왕족인 여씨였고, 당시 백제의 주요 세력이었던 해씨나 진씨는 없었다.
그리고 당시 왕자였던 문주왕이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또한 왕궁을 장려하게 짓는 등 큰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 왕실의 영도력 자체를 약화시켜 실패된 내정을 만들었다.

 

 


3) 위례성의 함락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도 처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첩자로 보낸 승려 '도림'의 진언에 따라 왕성의 성곽과 궁실, 누각, 활 쏘는 사대를 짓고 선왕의 능묘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국고가 고갈 되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고, 이를 틈타 쳐들어온 고구려군에 의해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4) 도미전
<삼국사기> '도미전'의 개루왕은 고구려 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에서 왕은 잔인하게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