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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태조왕] 전제왕권 토대를 마련한 계루부 출신의 왕

[한국사-태조왕] 전제왕권 토대를 마련한 계루부 출신의 왕

 

 

1. 생애: 47년~165년


2. 재위 기간: 53년~146년


3. 휘: 고궁


4. 묘호: 없음, 시호: 태조


5. 신상정보

 

[KBS2드라마 바람의나라-갈사왕의 손자 도진]
[태조왕 당시의 고구려 영토 확장]

출생일: 47년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165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고재사(고추가)
모친: 부여태후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2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고구려의 제2대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고재사'와 부여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탄생함.
2) 53년 제5대 모본왕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고재사'를 추대했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
3) 아버지 '고재사'를 대신하여 53년 7세의 나이로 고구려 제6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영토확장
56년: 동옥저를 정복해 성읍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
68년: 부여의 망명 세력인 갈사국을 병합.
72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음.
74년: 환나부 패자 설유로 하여금 주나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음.


2) 중앙통제력 강화
98년 8개월에 걸친 책성의 순수, 102년 책성 안무, 114년 남해 지방 순행 등을 통해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갔다.


3) 후한과의 관계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후한에 대해서 때로는 사절을 파견해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그들의 압력을 극복하고 서방 진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즉, 55년 요서지역에 10성을 쌓게 하여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105년에는 후한의 요동군을, 111년과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 및 낙랑군 소속의 화려성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21년 1월 후한의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의 침공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항복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요동·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을 공격해 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였다.
146년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과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현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4) 전제왕권적 지배체제 토대 마련
태조왕은 재위 기간 동안 후한의 압력 차단과 서방 진출 기도를 통해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68년에는 투항해온 갈사왕의 손자 도두를 우태로 삼았고, 74년에는 이미 복속했던 주나의 왕자 을음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주변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왕권 하에 흡수해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태조왕은 후한 유주자사 풍한의 침입을 격파하면서 점차 권력을 장악한 동생 수성이 왕위까지 노리자 좌보 고복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6년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5) 고구려 왕계의 변동
태조왕이라는 왕호나 119세라는 지나치게 긴 수명, 중국측 사서와의 차이 등으로 인해 이전의 왕계와는 단절된 모습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대체로 학계에서는 태조왕대에 고구려 왕계의 변동이 있었다고 본다. 모본왕 피살 이후 고구려 연맹체 내부에 상당 기간 분쟁과 혼돈이 진행된 뒤 태조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통합을 추진했으며, 소수림 왕대에 태조왕계에 태조왕 이전의 왕계를 연결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조왕계와 그 이전 왕계를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태조왕의 수명과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의 변동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류부에서 계루부로의 변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계루부 내에서 이전의 왕계와는 다른 방계로의 변동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구려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