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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대무신왕]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 배경의 왕

[한국사-대무신왕]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 배경의 왕

 

 

1. 생애: 4년~44년


2. 재위기간: 18년~44년


3. 휘: 고무휼


4. 묘호: 세종, 시호: 대무신왕, 대주류천효명황제


5. 신상정보

 

[KBS2드라마 바람의나라-대무신왕]
[KBS2드라마 바람의나라-대무신왕]
[KBS2드라마 바람의나라-대무신왕]

[SBS드라마 자명고-호동왕자와 낙랑공주]
[SBS드라마 자명고-대무신왕]
[SBS드라마 자명고-대무신왕]

출생일: 4년
출생지: 동부여
사망일: 44년
매장지: 대수촌원이란 곳에 장사지냈으나 능 위치는 전해지지 않음
부친: 유리왕
모친: 후궁 송씨
배우자: 해씨부인 외 1명
자녀: 2남


6.출생 및 즉위 과정

1) 4년 유리명왕 셋째 아들로 다물후 송양의 딸인 유리명태왕 후궁 송씨의 소생으로 탄생.
2) 유리왕의 첫째 아들이 요절, 둘째가 자살. 이에 유리왕이 갑자기 죽으면서 셋째인 무휼이 고구려 3대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동부여와의 전쟁
21년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고구려의 장수인 괴유가 대소왕을 죽였으나 부여군에게 포위 당한 끝에 후퇴하였다.
대소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음력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2) 한나라와의 전쟁
26년 개마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그해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하였다. 또한 을두지, 송옥구 등을 등용하여 내치를 다졌다.
28년 7월에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위나암성이 암석의 땅으로 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 낙랑 정벌
32년에는 낙랑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국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이 옥저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와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낙랑 정벌 기록은 현재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낙랑을 한사군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으며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 낙랑국과 낙랑군이 병존하였던 정치체로서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다.


4) 외교관계
32년 후한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구려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