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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의자왕] 나당연합에 무너진 3천궁녀와 낙화암의 주인공

[한국사-의자왕] 나당연합에 무너진 3천궁녀와 낙화암의 주인공

 

 

1. 생애: 생년미상~660년


2. 재위 기간: 641년~660년


3. 휘: 의자


4. 묘호: '없음', 휘: 의자, 별호: 해동증자


5. 신상정보

 

[영화 황산벌-의자왕]
[영화 황산벌-의자왕]
[영화 황산벌-의자왕]
[EBS 5분 사탐한국사-의자왕 영정사진]
[KBS1 대왕의 꿈-의자왕]
[KBS1 대왕의 꿈-의자왕]
[MBC 계백-의자왕]
[MBC 계백-의자왕]

 

출생일: 590년대 중반 이전 탄생으로 추정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660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무왕
모친: 사택왕후 혹은 선화공주로 추정
배우자: 은고
자녀: 적자 5남 외 서자 41명으로 추정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백제 30대 왕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532년(무왕 33년)에 태자로 책봉됨.
2) 641년 선왕인 무왕이 죽은 후 뒤를 이어 백제 마지막 31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친고구려 정책
의자왕은 집권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친고구려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중국 대륙에서의 통일 제국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의자왕은 당의 팽창주의가 한반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고구려가 백제를 막아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친고구려 정책을 취한 것이다.
고구려 또한 백제의 대외정책 변화에 부응하여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집권하였다.


2) 신라 고립 정책
의자왕 중국 대륙의 외풍을 막아냄과 동시에 경쟁국인 신라를 고립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고 하였다.
642년 7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신라는 이를 돌파하고자 고구려와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5년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당에 협조하자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당의 팽창주의에 주변 나라가 소용돌이를 치는 가운데 의자왕은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은 실리 정책을 취한 것이다.


3) 유교를 바탕한 집권력 강화
의자왕은 유교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의자'라는 이름 자체가 유교적 색채가 짙으며, '성충', '의직', '윤충' 등 신하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집권 초기에 주.군을 순무 하거나 죄수를 사면한 것도 유교에서 말하는 왕도정치와 통한다.
따라서 의자왕은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유교적 정치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당나라와의 적대적 관계
651년 당나라는 백제에게 신라와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응분의 대가가 따를 것임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백제는 655년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의자왕이 당이 아닌 고구려 편에 섰던 것임을 나타내지만 백제가 당의 통첩을 무시하자 신라와 당은 백제를 먼저 정벌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5) 나당연합군의 공격
660년 당의 소정방이 이끈 13만 대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백제의 계백이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저지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660년 7월 12일 두 나라 군대가 합류하여 사비성이 포위당하자 의자왕은 7월 13일 웅진성으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사비성은 맥없이 무너졌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및 웅진 방령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6) 백제의 멸망
660년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 측과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9월 3일에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부여융.부여연 및 대신.장사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고 끌려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다. 그해 11월 1일 낙양에 도착하여 당 고종을 만나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며칠 뒤 병사하였다.


7) 낙화암과 3천 궁녀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이 술과 음란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멸망했다는 상징적 존재로 낙화암에서 투신한 3천 궁녀가 거론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사비성 함락 직전 때는 군대를 보내어 싸웠다고 하고 있으며,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없다.
낙하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비슷한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 1권 태종춘추공인데, "궁녀들이 왕포함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하여 타사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쓰여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