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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무왕] 서동요와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왕

[한국사-무왕] 서동요와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왕

 

 

1. 생애: 생년 미상~641년


2. 재위 기간: 600년~641년


3. 휘: 부여장


4. 묘호: '없음', 시호: 무


5. 신상정보

 

[SBS드라마 서동요-무왕]
[SBS드라마 서동요-무왕]
[SBS드라마 서동요-무왕]
[SBS드라마 서동요-무왕]
[KBS1드라마 대왕의 꿈-무왕]
[MBC드라마 계백-무왕]
[익산 쌍릉-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익산
사망일: 600년
매장지: 사비 (현 익산에 위치한 쌍릉 대왕릉으로 추정하여 발굴 진행 중)
부친: 법왕 혹은 위덕왕(<삼국사기>등 사서에는 법왕의 아들, 중국 남북조 시대 <북사>에는 위덕왕의 서자로 기록)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사택왕후, 선화공주
자녀: 1남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백제 27대 왕 위덕왕의 아들 혹은 29대 법왕의 서자로 기록되는 등 태생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음.
2) 600년 선왕인 법왕이 죽은 후 뒤를 이어 백제 30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신라와의 전쟁
무왕은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의 충돌이 많았다.
602년 신라 아막산성을 공격했으나 패배.
611년 신라 가잠성을 공격하여 승리.
616년 신라 모산성을 공격했으나 패배.
623년 신라 늑노현을 침범.
633년 신라 서곡성을 점령.
636년 신라 독산성을 습격했으나 패배.


2) 고구려 남진 견제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고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공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했으나 당 태종이 남부여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3) 왜와의 교류
602년 관륵을 왜에 파견하여 천문.책력.지리.둔갑방술 등에 관한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


4) 왕권강화 정책
무왕의 영역 확대는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정복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국제 문제에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강화된 왕권의 표징과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을 중수했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상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5) 익산지역 천도 및 미륵사 창건
무왕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곳에 별도를 경영하고 익산 천도를 통해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6) 서동설화
신라계 고려의 대법인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 서동설화가 나온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 미륵사지 석탑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닌 사택왕후라는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화 공주와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