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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위덕왕] 관산성 전투로 추락된 왕권 회복에 힘쓴 왕

[한국사-위덕왕] 관산성 전투로 추락된 왕권 회복에 힘쓴 왕

 

 

1. 생애: 525년~598년


2. 재위 기간: 554년~598년


3. 휘: 창


4. 묘호: '없음', 시호: 위덕


5. 신상정보

 

[KBS2 드라마 신라화랑-위덕왕]
[KBS2 드라마 신라화랑-위덕왕]
[SBS 드라마 서동요-위덕왕]
[KBS2 미스터리추적, 능산리 고분군]
[KBS2 미스터리추적, 위덕왕 당시 백제]

 

출생일: 525년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554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성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2남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백제 26대 왕 성왕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을 따라서 창왕이라고도 함.
2) 554년 아버지 성왕이 신라와의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한 후 그 뒤를 이어 백제 27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 쇠퇴
관산성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성왕대 신장되었던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이 쇠퇴하고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위덕왕은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안으로는 패전으로 인해 야기된 정정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야 했고, 밖으로는 실추된 백제 국가의 위상을 되찾아야 했다.


2) 출가수도 결행
위덕왕의 출가는 관산성 대패와 성왕의 죽음으로 신라정벌을 반대했던 신하들의 책임추궁을 받아 정치적 곤경에 빠지는 것을 모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관산성 전투 이후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국왕직을 걸고 출가수도 문제를 던져 보았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위덕왕은 출가수도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철해했고 1,000명의 백성들을 도승하고 많은 공덕을 베푸는 선에서 신하들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었다.
당시 위덕왕이 불교적인 도승행사를 통해 대신들과의 타협을 이루어 낸 것은 당시 왕권 약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위덕왕이 기로를 포함한 대신들과의 타협과 조화를 통해 실추된 왕권과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불 수 있다.


3) 성왕 능사 창건
위덕왕은 왕위 오른 후 먼저 신라에서 송환된 부왕의 유해를 빈소에 안치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장례의식을 준비했으며 성왕의 위업을 추복 하고자 부여 능산리 왕릉 묘역에 대규모 사업의 능사를 창간하였다.
1993년 발굴 조사된 이 절터의 제3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상기 능산리 능사의 낙성은 성왕의 패사 이후 위덕왕 집권 초기의 혼란했던 지배질서를 극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성왕의 위업을 추모하여 성왕의 중흥 사업을 계승한다는 위덕왕의 의지를 대내적으로 천명하는 백제 왕권의 상징물로 이해된다.


4) 왕권기반 구축 작업
567년 당시부터 거의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위덕왕은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대내적인 체제 정비에 전념할 수 있었다.
불교 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 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의 강화, <백제본기>와 같은 역사편찬으로 왕실의 권위를 정당화시키려는 이념의 수립 등을 통해 점차 왕권 기반의 구축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5) 중국 왕조와의 교류
위덕왕 집권 당시 중국 왕조인 북제.북주.수를 대상으로 백제 사상 가장 많은 대외교섭 횟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570년 북제로부터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에 책봉되고, 571년에는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