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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무령왕] 웅진시대 황금기를 만든 무령왕릉의 주인

[한국사-무령왕] 웅진시대 황금기를 만든 무령왕릉의 주인

 

 

1. 생애: 462년~523년


2. 재위 기간: 501년~523년


3. 휘: 부여사마


4. 묘호: '없음', 시호: 무령


5. 신상정보

 

[MBC 드라마 제왕의딸, 수백향-무령왕]
[MBC 드라마 제왕의딸, 수백향-무령왕]
[KBS 대전 특별기획-무령왕]
[KBS 대전 특별기획-무령왕]
[무령왕릉 내부 모습]
[무령왕 영정사진, 출처:공주시]
[무령왕 당시 백제의 북방정책 영역]

 

출생일: 462년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477년
매장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57
부친: 동성왕(혹은 개로왕의 동생 혼지.곤지의 아들)
모친: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확인불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백제 23대 왕 동성의 둘째 아들(백제신찬, 일본서기) 혹은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로 462년 탄생.(삼국사기, 삼국유사)
2) 501년 12월 위사좌평 백자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백제 25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백가 토벌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한솔 해명과 함께 501년 가림성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였다.


2) 북방정책 추진
무령왕 때는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501년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을 습격.
503년 마수책을 태우며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 격퇴.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 개의 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축조.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가 말갈과 합세해 한성을 치고자 쳐들어왔으나 격퇴.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위천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격퇴.

 


3) 중국 남조 양과 외교
무령왕은 중국 남조의 양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하여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받았다.


4) 섬진강 일대 확보
512년 상차리.하차리.사타.모루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무령왕이 가야를 공략하여 임실, 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경남 서해안으로 진출하였음을 상징한다.


5) 정치적 개혁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이후 일어난 두 차례 반란이 모두 병관좌평, 위사좌평이라는 관직을 가진 좌평에서 일어났기에 좌평제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좌평을 지배 귀족들의 신분 서열을 나타내는 관등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행정 업무는 22부사가 전담할 때 최고의 신분을 가진 귀족이 실권마저 장악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좌평제를 22부사제로 개혁하는 안이 제기되었다.


6) 민심안정 정책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했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즉, 무령왕은 적극적인 진휼을 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고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7) 호구조사 정책
도망간 백성을 찾아내서 백제로 옮기어 호적에 편입시켰으며, 임나 지역에 대한 호구조사를 시행하여 호적 체계를 정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