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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평원왕] 온달설화의 배경 및 수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한 왕

[한국사-평원왕] 온달 설화의 배경 및 수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한 왕

1. 생애: 생년미상~590년


2. 재위 기간: 559년~590년


3. 휘: 고양성


4. 묘호: 평원왕, 시호: 평강상호왕


5. 신상정보

[채널A 천일야사-평원왕]
[EBSi 5분사탐한국사-평원왕]

[KBS1 역사저널 그날-평원왕 당시 수나라 중국 통일]
[채널A 천일야사-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채널A 천일야사-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590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양원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2명으로 구분)
자녀: 3남 1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고구려 24대 양원왕의 첫째 아들로 탄생
2) 559년 양원왕 13년에 태자로 책봉.
3) 559년 부친 양원왕이 승하하면서 뒤를 이어 고구려 25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민심수습을 위한 노력
560년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을 장려하였으며, 궁실의 수리를 중단하는 등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의 전제적 권한은 이미 귀족세력들의 발호에 의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2) 장안성 수도 천도
586년에는 지금의 평양 대성산성 일대에서 장안성(현 평양시가)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는 장수왕이 평양의 동북 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이 장안성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평원왕대에 완성시킨 것이다.


3) 중국 북조 및 돌궐과의 관계
외교면에서 당시의 중국은 남조의 진나라와 북조의 북제·북주가 대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전통적인 외교정책대로 이들과 두루 교섭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관계의 안정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같이 중국과는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가진 듯하지만 양원왕 이래 북조와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북주의 무제가 요동을 공격해왔을 때 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에서 싸웠다.
586년에는 고구려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별부 축복 등이 이탈해 수나라에 투항하였고, 돌궐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긴장 상태는 여전하였다.


4) 나제동맹의 결렬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기존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자, 고구려는 이들과 소강상태를 유지한 채 북방과 서방의 변화에 더욱 주목하였다.


5) 수나라와의 전쟁 준비
589년에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수나라 문제는 590년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어 "왕이 요수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만 하겠는가?"라고 위협을 가하였다.
평원왕은 이러한 수나라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준비하다가 사망하였다.


6)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평원왕의 재위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설화의 바탕된 시기이기도 하다.
'온달 설화'는 평민의 신분으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 설화이며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 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바보온달로 구전되는 인물 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되며, 갈등구조상 동일 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