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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영양왕] 담징·법정을 일본에 파견하고 수나라와 4차례 전쟁을 치른 왕

[한국사-영양왕] 담징·법정을 일본에 파견하고 수나라와 4차례 전쟁을 치른 왕

 

 

1. 생애: 생년미상~618년


2. 재위기간: 590년~618년


3. 휘: 고원


4. 묘호: 영양왕, 시호: 평양왕, 대흥왕


5. 신상정보

 

[SBS드라마 연개소문-영양왕]
[SBS드라마 연개소문-영양왕]
[KBS1 역사스페셜-영양왕]

 

 

 

 

[KBS1 역사스페셜-영양왕 당시 대수전쟁]
[KBS1 역사저널 그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618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평원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1남


6.출생 및 즉위 과정
1)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첫째 아들로 탄생
2) 565년 평원왕왕 7년에 태자로 책봉.
3) 590년 부친 평원왕이 승하하면서 뒤를 이어 고구려 26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역사서편찬
영양왕은 재위기간 중, 60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을 시켜 종래의 『유기(留記)』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 5권이라는 역사서를 내게 한 것이 주목된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도 역사서를 편찬한 왕들은 왕조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군주들임을 생각할 때, 영양왕대의 역사서편찬은 부왕인 평원왕 이래의 국가의 안정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결실을 계승, 발전시킨 국력의 바탕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2) 화전양면 외교
대외관계에 있어서 영양왕의 위치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원적인 축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6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589년 수나라의 중국통일로 재편성되어가는 와중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와 더불어 수나라 문제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에 봉해졌고, 또한 부왕이 가지고 있던 요동군공이라는 작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조공을 통해 수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모색을 시도하였다. 반면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말갈족·거란족들을 조종하여 자기편에 넣고 돌궐족과의 제휴도 모색하였다.

 

 


3) 수나라의 침입
영양왕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를 선제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국력을 총집결해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제1차 침입(598년): 앞서 요서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발로 수나라의 30만 군사가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기근·질병·장마 등으로 인해 스스로 퇴각하였다.
제2차 침입(612년): 양제가 국력을 경주하여 13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지구전을 펴 수군의 침략예봉을 꺾고 또 대동강에서는 침략군의 수군을 대파하였다.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해 평양성 가까이 진격했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후퇴하던 중 명장 을지문덕에 의해 살수에서 참패를 당해 총퇴각하였다.
제3차 침입(613년): 요동성·신성 등에서 고구려군이 선전하였고, 또한 수에서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게 되었다.
제4차 침입(614년): 이때는 수나라의 내부적 혼란과 평화교섭을 원했던 고구려의 이해가 맞물려 철군이 이루어졌다.


4) 수나라의 멸망
4차례 침입 이후로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몇 번이나 계획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모두 실행되지 못했다.
당시 수나라는 무리한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결국 618년 수 양제는 강도에서 피살되었으며, 이로써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5) 일본과의 교류
영양왕 집권 당시에는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595년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된 혜자가 도일하였고, 610년 담징·법정 등을 파견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