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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보장왕] 안시성전투 및 연개소문 사후의 고구려 마지막 왕

[한국사-보장왕] 안시성전투 및 연개소문 사후의 고구려 마지막 왕

 

 

1. 생애: 생년미상~668년


2. 재위 기간: 642년~668년


3. 휘: 고장


4. 묘호: 보장왕, 시호: 없음


5. 신상정보

 

[KBS1 드라마 대조영-보장왕]
[KBS1 드라마 대왕의꿈-보장왕]
[SBS드라마 연개소문-보장왕]
[KBS1 역사저널 그날-고구려의 안동도호부]

 

 

 

 

[KBS2 드라마 칼과꽃-보장왕]
[KBS2 드라마 칼과꽃-보장왕]
[영화 안시성]
[영화 안시성]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642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고대양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4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셋째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며, 영류왕의 친동생인 대양왕의 맏아들로 탄생.
2) 642년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그의 큰아버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를 받고 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도교 진흥책
재위 기간 중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았고, 643년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요청해 도사를 초빙하는 등 도교 진흥책을 썼다.
이에 대해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 세력의 반발이 심했고, 보덕과 같은 승려는 650년에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도교 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믿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2) 당나라와의 관계 고조
재위 기간 중의 국제 관계는 즉위 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 정책으로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적대 관계가 계속되어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와 관계를 재개해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3) 당나라와의 전쟁 및 안시성 전투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지휘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해 고구려를 피폐하게 만들기로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그런데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당 태종이 649년에 죽음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지만,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또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654년 거란족을 공격하는가 하면 655년에는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우호 관계에 있던 세력들을 공격해 당나라를 자극했다.
이에 655년 당나라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평양성까지 침입해 온 당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유민의 부흥 운동이 전개되자 신라와 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해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4)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멸망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에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 형제간에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 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다시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668년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해 멸망하고 말았다.


5) 고구려 부흥 운동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치열한 반당 운동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 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 왕에 임명되어 당나라에 잡혀간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 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해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로 유배되었으며, 682년경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