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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영류왕] 도교 도입 및 천리장성 축조 후 연개소문에게 살해당한 왕

[한국사-영류왕] 도교 도입 및 천리장성 축조 후 연개소문에게 살해당한 왕

 

 

1. 생애: 생년미상~642년


2. 재위 기간: 618년~642년


3. 휘: 고건무


4. 묘호: 영류왕, 시호: 건무왕, 무양왕


5. 신상정보

 

[SBS드라마 연개소문-영류왕]
[KBS2 드라마 칼과꽃-영류왕]
[KBS2 드라마 칼과꽃-영류왕]

 

 

 

 

[KBS2 드라마 칼과꽃-영류왕와 연개소문]
[KBS2 드라마 칼과꽃-영류왕와 연개소문]
[고구려의 천리장성(붉은선), 출처: 위키페디아]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642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평원왕
모친: 확인불가
배우자: 확인불가
자녀: 1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차남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탄생.
2) 618년 영양왕이 후사 없이 죽자 뒤를 이어 고구려 27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당나라의 건국 및 대당 외교정책
영류왕의 즉위년(618년)에 중국에서는 수나라를 이어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해 도교가 들어왔고, 다음 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2) 불교 위축 및 도교 유행
영류왕의 즉위 후 고구려에서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영류왕이 즉위 이후 영양왕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 세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도교를 들여와 후원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승 보덕의 백제 망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 세력에 대한 견제는 보장왕 즉위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영류왕의 도교 수입 및 진흥은 노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던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영류왕대의 온건한 대외정책 추진을 대외 강경파였던 영양왕대의 신흥 귀족세력들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3) 당나라의 공격을 대비한 천리장성 축조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을 복속시키면서 양국 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을 파괴한다든지,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였기에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을 수축하기 시작해 그 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4) 신라와의 사투
영류왕 즉위 당시에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5) 연개소문의 정변
영류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의 정변에 의해 몸이 토막 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류왕과 연개소문 간의 알력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던 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 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즉 대당온건론을 중시하였던 영류왕이 대당강경론자였던 연개소문과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