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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미추이사금] 미추왕릉, 김알지, 김씨왕, 남당, 신라 첫 김씨계의 왕

[한국사-미추이사금] 미추왕릉, 김알지, 김씨왕, 남당, 신라 첫 김씨계의 왕

 

 

1. 생애: 생년미상~284년


2. 재위기간: 261년~284년


3. 휘: 김미추


4.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이사금


5. 신상정보

 

[미추왕릉이 위치한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
[대릉원 내 미추왕릉 위치]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261년
매장지: 대릉(죽장릉에 위치한 미추왕릉)
부친: 김구도
모친: 이칠 갈문왕의 딸
배우자: 광명부인, 보반부인, 아류부인
자녀: 2남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김알지의 7세손 구도갈문왕과 이칠갈문왕의 딸 박씨 사이에서 탄생 함.
2)첨해이사금이 후사 없이 죽자 신하들은 김미추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제 13대왕으로 즉위 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가계의 논란
미추 이사금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구도의 아들이라 한다.
그러나 아버지로 추정되는 김구도와 활동년대가 7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는 점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첨해이사금과 조분이사금은 구도의 딸 옥모부인 소생이다. 조분이사금을 구도의 외손자라 본다면 광명부인은 미추의 외조카의 딸, 손녀뻘이 되어 연대가 맞지 않는다.


2) 김씨계의 첫 왕
미추이사금이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때 비로소 김씨족이 박씨족·석씨족보다 더 큰 세력을 점유했기 때문이다.
한편 김미추가 조분이사금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신라에서의 왕위계승은 사위나 아들이나 자격이 동등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미추이사금 이후 왕위가 다시 석씨로 넘어간 것을 보면 김씨족이 석씨족을 압도할 만큼 지속적으로 권력 강화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씨족의 정치적 위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추왕대는 신라사에서 실질적인 김씨 왕실의 시작으로서 내물왕 이후의 김씨왕실이 세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3) 왕권의 행사
즉위 후 아버지인 구도를 갈문왕으로 추봉하여 김씨족의 정치적 위상을 고양시켰고, 남당을 통해 왕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미추이사금대 남당정치에는 왕이 남당을 통하여 왕권을 행사하는 모습이 뚜렷이 부각된다.


4) 백성 구휼 정책
미추이사금은 농민이나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힘썼다.
264년, 황산을 행차해 힘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였다.
268년, 가뭄이 들자 사신을 각지로 보내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게 했다.
272년, 농사에 해로운 일은 모두 없애라고 명했다.
276년, 신하들이 궁궐 재 중측을 청했으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일을 반대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다.


5) 왜의 금성 침입
미추이사금 즉위 당시 왜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석우로의 아내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왜의 사신을 불에 태워 죽여서 왜인들이 금성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