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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헌덕왕] 김헌창, 김헌청의난, 녹진, 인사원칙을 실현한 왕

[한국사-헌덕왕] 김헌창, 김헌청의난, 녹진, 인사원칙을 실현한 왕

 

 

1. 생애: 생년미상~826년


2. 재위 기간: 809년~826년


3. 휘: 김언승


4. 묘호: 없음, 시호: 헌덕, 왕호: 왕


5. 신상정보

 

[김헌창의 난 반발 과정]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헌덕왕릉]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826년
매장지: 헌덕왕릉(경주시 동천동)
부친: 혜충태자 김인겸
모친: 성목태후 김씨
배우자: 귀승부인 김씨
자녀: 2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과 성목태후 김씨의 맏아들로 탄생.
2) 801년 어룡성 사신을 거쳐 상대등으로 임명.
3) 809년 동생인 이찬 김제옹과 반란을 일으켜 신라 제41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이찬 김제옹과의 난
809년에는 동생인 이찬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다.
이때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 대에는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 개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애장왕 당시의 개혁 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에 못지않게 왕권강화에 도전하는 세력의 반발 또한 거세었다.


2) 애장왕 당시의 개혁
애장왕 당시 개혁의 주도자가 헌덕왕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장왕대 최고의 실력자였고 또 뜻을 같이하는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관제개혁은 그 목적이 애장왕의 왕권 강화라기보다는 김언승과 그 일가의 권력집중을 위한 것이었다.
상대등에 있었던 언승은 왕에 버금갈만한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언승은 애장왕대 일련의 관제개혁을 통해 행정체계를 재정비하여 지휘감독을 일원화하였고, 귀족과 사원세력의 결합을 억제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3) 당나라 출병 지원
당나라에서는 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당해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도왔다.


4) 녹진의 인사원칙 제언
헌덕왕 당시 충공이 상대등이 되어 인사를 처리하는 데 갑자기 병이 들었다.
그러자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에 비유해 인사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충공은 물론 부군인 수종과 헌덕왕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이었다.


5) 김헌창의 난
822년 발생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해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일어났다.
또한, 녹진의 제안이 김헌창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도 난이 일어나게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헌덕왕 14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김수종·김충공을 따르는 귀족들과 이에 반대하는 정치에서 소외된 귀족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진 갈등의 소산이다.
애장왕대부터 헌덕왕의 치세 기간을 통하여 추진된 일련의 개혁은 국왕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한 의도에서 추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헌덕왕의 형제들이 육두품의 협력을 받아 전담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른 많은 귀족들은 견제되고 소외되었다.
김헌창의 난은 이러한 갈등의 한 소산이었다. 이러한 김헌창의 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립된 가계의 귀족들이 사병 세력을 바탕으로 상호 연합해서 항쟁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연합의 범위가 중앙을 넘어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