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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흥덕왕] 흥무대왕, 장보고청해진, 흥덕왕릉, 사치금지령을 내린 왕

[한국사-흥덕왕] 흥무대왕, 장보고청해진, 흥덕왕릉, 사치금지령을 내린 왕

 

 

1. 생애: 777~836년


2. 재위 기간: 826년~836년


3. 휘: 김수종, 김수승, 김경휘


4. 묘호: 없음, 시호: 흥덕, 왕호: 왕


5. 신상정보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흥덕왕릉]
[흥무대왕 김유신의 영정을 모신 길상사]
[흥덕왕 당시 설치된 청해진, 현재 완도에 위치]

 

 

 


출생일: 777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836년
매장지: 흥덕왕릉(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부친: 혜충태자 김인겸
모친: 성목태후 김씨
배우자: 정목왕후 김씨
자녀: 1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과 성목태후 김씨의 아들로 탄생했으며, 41대 헌덕왕의 동복아우.
2) 819년 김수빈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상대등으로 임명.
3) 826년 헌덕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신라 제42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애장왕대의 정치개혁을 시도
흥덕왕은 애장 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 혹은 그것이 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했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귀족세력의 억제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헌덕왕대의 김헌창의 난을 마무리짓는 조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관등에 따른 사치금지령
흥덕왕대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거기·기용·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해 발표한 것이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해 골품 간의 계층 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진 조치였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 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복색·거기·기용·옥사 등 규정의 전반적인 내용을 볼 때, 육두품·오두품·사두품, 평민 사이에는 상당한 출입이 허용되고 있는데 반해 왕과 진골, 그리고 진골과 육두품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다.
즉 이들 규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왕과 진골, 진골과 육두품 사이의 준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흥덕왕의 개혁은 행정기구의 한식 개편과 물리적인 힘에 의한 귀족세력의 억제, 그리고 그를 통한 왕권의 전제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 풍속 규제 정책 역시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3) 흥무대왕
835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 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그 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장려를 들 수 있다.


3) 청해진 설치
828년에 군복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 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고 청해진대사에 임명하였다. 다음 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서해안에 횡행하는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 장보고가 청원하여 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청해진과 당성진의 설치는 해적의 퇴치와 아울러 노예무역을 중심으로 한 교역활동을 통하여 그 경제력을 확대시키고 있던 서남 해변의 지방호족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조처였다.
즉 헌덕왕 14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에 가담한 지방호족 세력의 거점지역이 이들 진이 설치된 서남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4) 흥덕왕과 앵무새
삼국유사에는 흥덕왕이 왕비를 잃은 슬픔을 한 쌍의 새에 비유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었고, 홀로 된 숫놈은 슬프게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그러자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자기 짝인 줄로만 알고 그 거울을 쪼아대었다.
그러다 곧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