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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문성왕] 김경응, 원홍, 장보고염장, 장보고의난을 겪은 왕

[한국사-문성왕] 김경응, 원홍, 장보고염장, 장보고의난을 겪은 왕


1. 생애: 생년미상~857년


2. 재위 기간: 839년~857년


3. 휘: 김경응


4. 묘호: 없음, 시호: 문성, 왕호: 왕


5. 신상정보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문성왕릉]
[KBS2 드라마 해신, 문성왕을 왕으로 즉위 시킨 김양]
[장보고와 문성왕]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857년
매장지: 문성왕릉(경주시 서악동)
부친: 신무왕
모친: 정계부인
배우자: 소명왕후, 흔명부인 박씨
자녀: 1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의 제45대 신무왕과 정종태후(정계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탄생.
2)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839년 태자로 봉해짐.
2) 839년 음력 7월 23일에 신무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제46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문성왕과 장보고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예징을 상대등에 임명했으며, 김양에게 소판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무왕대 이미 강성한 세력을 가졌던 장보고를 공신으로 봉하고, 김식·대흔 등 민애왕의 측근들을 사면했던 것은 문성왕의 왕권에 심대한 위협이 되었다.
즉, 사면받았었던 민애왕 계열의 귀족세력과 공신 장보고가 문성왕대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연이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2) 장보고의 반란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두 번째 비로 세우려 했는데, 조신들이 섬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해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에 의해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운 것에 관한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폐지했으며, 그곳 민가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3) 민애왕 측근 세력의 반란
문성왕 9년 양순과 흥종의 반란이 있었고, 문성왕 11년 9월 김식과 대흔이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종전의 민애왕측 귀족들의 잔여세력과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즉 이들은 신무왕-문성왕의 왕권을 반대하고, 인겸계의 왕위 계승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신무왕의 왕위는 뒤를 이어 문성왕대까지도 이처럼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귀족세력의 도전과 반란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4) 불교진흥
문성왕은 불교진흥에 관심을 가졌다.
851년 당나라에 갔던 사신 아찬 원홍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