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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신무왕] 김균정, 김우징, 균정계의 승리로 즉위한 왕

[한국사-신무왕] 김균정, 김우징, 균정계의 승리로 즉위한 왕


1. 생애: 생년미상~839년


2. 재위 기간: 839년~839년


3. 휘: 김우징


4. 묘호: 없음, 시호: 신무, 왕호: 왕


5. 신상정보


[경주시 동방동에 위치한 신무왕릉]
[KBS1 역사저널 그날, 신무왕]
[KBS1 역사저널 그날, 신무왕]
[청해진 대사 장보고]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839년
매장지: 민애왕릉(경주시 동방동)
부친: 김균정
모친: 진교부인
배우자: 정계부인 김씨
자녀: 1남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의 증손자로, 상대응 김균정과 전교부인 박씨의 아들로 탄생.
2) 836년 아버지인 김균정을 왕우로 세우려 했으나, 반대세력에 패배하여 837년 청해진으로 건너가 장보고의 보호를 받음.
2) 839년 청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신라 제45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김헌창의 난 진압
812년에 균정은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822년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 장보고에 의탁
42대 흥덕왕이 죽자 발생한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김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으로 도망쳐 대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3) 왕위 등극
838년 장보고의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 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무주에 파견해 토벌군과 싸우게 했으나 패배했다.
다음 해 정월에는 달벌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접전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대흔·윤린 등 역시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싸움 와중에 월유댁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신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였다.


4) 균정계의 승리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 세력의 대립 속에서 균정계가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 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5) 신무왕과 장보고
신무왕은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2,000호의 실봉을 내렸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다. 이것은 청해진 세력의 강대함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해야 하는 과업을 남긴 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