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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벌휴이사금] 석탈해, 석탈해손자, 파진찬, 일길찬 군주 직위를 만든 왕

[한국사-벌휴이사금] 석탈해, 석탈해손자, 파진찬, 일길찬 군주 직위를 만든 왕

 

 

1. 생애: 생년미상~184년


2. 재위기간: 184년~196년


3. 휘: 석벌휴


4.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이사금


5. 신상정보

 

[벌휴이사금이 정복한 소문국의 지리적 위치, 현 의성군]
[의성군에 위치한 조문국(소문국)박물관]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196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석구추
모친: 지진내례부인
배우자: 내례부인 박씨
자녀: 2남 이상


6.출생 및 즉위 과정
1) 탈해이사금의 손자이자, 탈해이사금의 아들인 각간 석구추와 지진내례부인의 장남으로 탄생 함.
2) 8대왕 아달라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신하들의 추천을 받아 탈해이사금의 손자인 석별휴가 신라 9대왕으로 즉위 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석씨 왕계의 성립
연대상으로 석탈해가 죽은지 100년 지난 후 즉위한 것이기에 세대간 차이가 너무 심하다.
탈해 이후 석씨 세력이 쇠퇴해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거나, 벌휴계가 스스로 탈해의 후손이라는 근거도 없고 이치에 닿지 않는데도 억지로 끼워 맞추었기 때문으로 보는 학계의 의견이 많다.
선대 아달라이사금이 아들 없이 죽자 신하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운것으로 보아, 이는 전투 능력을 비롯한 문화 수준에서 우위에 있던 새로운 세력 집단이 경주로 진출해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석씨 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하게 영역을 확대하였다.


2) 샤머니즘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석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하니 이는 신라 사회에 2세기 말까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시사한다.


3) 군주 직위 설립
185년 군정을 담당하는 군주 직위를 만들어 파진찬에 구도, 일길찬에 구수혜를 임명하였다.


4) 백제와의 공방전
벌휴이사금은 구도와 구수혜를 처음 군주로 삼아 소문국을 치고, 188년 모산성, 189년 구양성, 190년 원산향·부곡성 등지에서 백제와 공방전을 치렀다고 전한다.


5) 박씨계의 고립
벌휴이사금의 왕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의 제휴 시대를 맞게 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