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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일성이사금] 정사당을 철치한 일성왕릉의 주인 일성이사금

[한국사-일성이사금] 정사당을 철치한 일성왕릉의 주인, 일성이사금

 

 

1. 생애: 생년미상~154년


2. 재위기간: 134년~154년


3. 휘: 박일성


4.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이사금


5. 신상정보

 

[경주시 탑동 산23번지에 위치한 일성왕릉]
[일성이사금 재임 당시 재연재해, 출처: EBS1 역사채널E]
[일성이사금 재임 당시 재연재해, 출처: EBS1 역사채널E]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154년
매장지: 일성왕릉(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23번지)
부친: 아도갈문왕(추측)
모친: 이간생부인
배우자: 지소례부인
자녀: 없음


6.출생 및 즉위 과정
1) 유리이사금, 일지갈문왕, 노례이사금의 형, 지마이사금이라는 네 가지 설이 있지만 타당성이 없음
2) 134년 지마이사금의 뒤를 이어 신라 7대왕으로 즉위 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불분명한 가계
신라의 7대 군주로 가계가 매우 불분명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유리이사금의 장남이며 적자라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일성의 아버지가 노례이질금(유리이사금)이라는 설과 전임자인 지마 이사금이라는 설도 같이 수록되어 있어서 다소 불분명하다.
유리이사금의 아들로 본다면 파사이사금은 그의 이복 형 또는 이복 동생, 지마이사금은 그의 조카가 되고, 지마이사금의 아들로 본다면 유리이사금이 증조부, 파사이사금이 할아버지, 지마이사금이 아버지가 된다.
134년은 유리이사금이 죽은 지 77년이나 지난 뒤이므로 이 기록대로라면 일성이사금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세가 되어서야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다만, 학계에서는 148년(일성이사금 15)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로 미루어 아도갈문왕이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며 일성이사금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판단한다.


2) 정사당 설치
138년 금성에 국가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대신들이 모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고 결정 및 처리하는 기능을 담당한것으로 추정된다.


3) 말갈의 침입
137년과 즉위 6년인 139년에 말갈이 침입해 이듬해인 140년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세웠다.
142년 말갈 공격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4) 자연재해 발생과 대응책
139년, 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죽었다.
14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149년, 금성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50년,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심했다.
왕은 대응책으로 144년에는 모든 주군이 제방을 수축하고 전야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였다.


5) 압독의 모반
146년 압독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한 뒤 남은 무리를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