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한국사

[한국사-아달라이사금] 족내혼, 연오랑세오녀 전설, 아찬길선 환원을 요구한 왕

[한국사-아달라이사금] 족내혼, 연오랑세오녀 전설, 아찬길선 환원을 요구한 왕

 

 

1. 생애: 생년미상~184년


2. 재위기간: 154년~184년


3. 휘: 박아달라


4.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이사금


5. 신상정보

 

[경주시 배동 삼릉에 위치한 아달라왕릉]
[연오랑세오녀 전설]
[포항 임곡리에 위치한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184년
매장지: 아달라왕릉(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삼릉)
부친: 일성이사금
모친: 지소례왕의 딸 박씨
배우자: 내례부인 박씨
자녀: 확인불가


6.출생 및 즉위 과정
1) 7대 일성이사금과 지소례왕의 딸 박씨(삼국유사에는 일지갈문왕의 딸로 기록)의 장남으로 탄생 함.
2) 154년 부친 일성이사금의 뒤를 이어 신라 8대왕으로 즉위 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족내혼
아버지는 일성이사금이고, 어머니는 지소례왕의 딸로 박씨이다.
왕비는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박씨로 8촌 사이의 족내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족내혼은 박씨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 계립령과 죽령 개통
아달라이사금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156년에 계립령의 길을 열고, 158년에 죽령에 교통로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백제와의 갈등이 커졌다.


3) 아찬 길선의 모반
165년 10월 아찬 길선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치자 왕은 백제에 길선의 신병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거절했다. 길선의 모반 사건은 신라 역사상 최초의 「반란」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 백제와의 공방전
165년 길선 환원 문제를 구실로 왕이 몸소 백제 원정을 나섰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167년 7월 백제가 신라를 역습해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잡아갔으며, 8월에는 일길찬 흥선을 시켜 군사 2만으로 백제를 공격하고 왕은 8천 기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넜다.
이에 백제는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


5) 왜와의 우호 관계
58년 왜인이 신라를 예방했으며, 173년에는 야마타이국의 여왕인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왔다.
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기록되어 있으나 탈자가 많아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연오랑과 세오녀에 관한 설화도 아달라이사금 재임 당시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6) 연오랑세오녀 전설
<삼국유사>권1 기이제1에는 아달라왕의 치세에 있었던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이름의 부부가 등장하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로서 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연오랑이 서 있던 바위(물고기라고도)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태운 채 그대로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연오랑을 보고 "이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라며 그들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바닷가로 나가서 남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바위 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했고, 세오녀가 그 바위에 올라가자 바위는 다시 움직여서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다시 놀라면서 연오랑에게 나아가 아뢰었고, 부부는 재회하여 세오녀는 왕인 연오랑과 함께 나란히 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