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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탈해이사금] 국호 계림, 김알지, 다파나국 출신 왕 석탈해

[한국사-탈해이사금] 국호 계림, 김알지, 다파나국 출신 왕 석탈해

 

 

1. 생애: 생년 미상~80년


2. 재위 기간: 57년~80년


3. 휘: 석탈해


4.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이사금


5. 신상정보

 

[MBC 드라마 김수로-석탈해]
[MBC 드라마 김수로-석탈해]
[MBC 드라마 김수로-석탈해]

 

 

 

 

[MBC 드라마 김수로-석탈해]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탈해왕릉]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80년
매장지: 경주 탈해왕릉(경북 경주시 동천동)
부친: 함달파왕
모친: 직녀국 공주
배우자: 아효부인
자녀: 1남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생년 미상으로 출생일은 확인 불가하며 함달파왕(다파나국, 용성국, 완하국, 함달왕 등)과 여국왕의 딸(적녀국왕의 딸)에서 태어난 설화가 존재.
2) 8년 남해차차중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의 자리에 오름.
3) 유리이사금은 두 아들의 재주가 탈해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왕위를 석탈해에게 물려주어 80년 4대 왕으로 즉위.


7. 주요 업적 및 삶

1) 출생 신화
부왕인 다파나국의 왕이 비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 동쪽 아진포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해 건져지게 되어 양육되었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를 공양하였는데 그가 석탈해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으로 봉사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석씨 부족이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했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 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2) 즉위까지의 과정
탈해는 8년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다.
유리이사금의 즉위 시에 이미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와 이빨 수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왕의 사위이므로 결국 박씨집단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한 철을 이용한 군사력 확보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 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연맹함으로써 왕실 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보기도 한다.


3) 호공 이야기
석탈해가 유년 시절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의 집터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해 그 집을 차지하였다.
탈해가 처음 신라 사회에 정착했을 당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일화는 이주민인 탈해집단과 선주민인 박씨족과의 대립을 알려준다.
그러나 탈해가 박씨족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또 탈해가 왕으로 즉위한 후 갈등관계에 있었던 호공을 대보로 삼는 등의 일은 박씨족과 연합한 양상을 알려준다.

 

 


4) 백제와의 전쟁
64년, 음력 8월 백제가 와산성을, 음력 10월에 구양성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 명을 내어 쫓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70년,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4년,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
75년, 음력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5) 김알지&국호 계림 변경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65년,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가 김알지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


6) 가야와의 전쟁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이 황산진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