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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내물마립간] 내물왕, 중앙집권국가, 마립간, 중국전진, 김씨세습을 만든 왕

[한국사-내물마립간] 내물왕, 중앙집권국가, 마립간, 중국전진, 김씨세습을 만든 왕

 

 

1. 생애: 생년미상~402년


2. 재위 기간: 356년~402년


3. 휘: 김내물, 나물, 나밀


4.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왕호: 마립간


5. 신상정보

 

[KBS1 역사스페셜, 내물왕]
[KBS1 역사스페셜, 마립간]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내물왕릉]
[내물왕 당시 교류한 중국 전진]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402년
매장지: 내물왕릉(경주시 교동에 위치)
부친: 각간 김말구
모친: 휴례부인
배우자: 김씨
자녀: 3남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구와, 휴례부인 김씨 사이에서 탄생함.
2) 356년 휼해이사금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자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신라 제17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미확실한 계보
내물마립간은 <삼국사기>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라고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하지 않으나, 미추이사금과 근친 관계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때문에 흘해이사금이 후계자 없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 마립간 왕호
왕호는 <삼국사기>에는 ‘이사금’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 또는 후세의 군장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된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해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어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3) 김씨계 왕위 독점 세습
내물마립간은 신라의 6부 대표와 지배층들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중앙정청인 ‘남당’에서 정사를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석·김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대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4) 중국 '전진'과의 외교
내물마립간의 재임 당시 신라는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특히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는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5) 고구려의 내정 간섭
당시 단독으로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던 신라는 마침내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399년에 내물마립간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이듬해 5만 명의 보병·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해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392년에는 내물왕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해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하였다.
401년에 고구려로부터 귀국한 실성이 내물마립간이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을 배제시키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의 압력이 배후에서 작용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런 만큼 신라가 내물마립간 때에 대내적으로는 비록 고대국가체제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야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내정간섭으로 인해 자주적인 발전 기반을 확고히 마련하지 못하였다.

 

 


6) 천재지변
내물마립간 재임 당시의 신라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였다.
366년, 여름에 전국적으로 산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큰 폭우가 내렸다.
372년, 봄과 여름 큰 가뭄이 발생하였다. 굶주린 백성과 유랑자가 많아지자 내물마립간은 사신을 보내어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381년, 여름에 가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이 많이 발생하였다.
388년, 금성에 수차례 지진이 발생하였다.
389년, 전염병이 창궐하고 메뚜기 떼 피해로 흉년이 들었다.
397년, 또다시 가뭄과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내물왕은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399년,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401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