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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문무왕] 안동도호부, 웅진도독부, 설인귀, 천존, 삼국통일을 이룬 왕

[한국사-문무왕] 안동도호부, 웅진도독부, 설인귀, 천존, 삼국통일을 이룬 왕

 

 

1. 생애: 626~681년


2. 재위기간: 661년~681년


3. 휘: 김법민


4. 묘호: 없음, 시호: 문무, 왕호: 왕


5. 신상정보
출생일: 626년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681년
매장지: 문무대왕릉(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부친: 태종무열왕
모친: 문명왕후
배우자: 자의왕후
자녀: 1남 이상

 

[KBS1 드라마 대왕의꿈, 문무왕]
[KBS2 드라마 삼국기, 법민]
[MBC 드라마 계백, 문무왕]
[SBS 드라마 연개소문, 문무왕]
[문무왕 당시 신라 영토, 출처: 위키페디아]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29대 왕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 김씨 사이에서 적장자로 탄생.
2)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제 30대 왕으로 즉위 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백제 잔적 정벌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인 661년에 옹산성과 우술성에 웅거하던 백제 잔적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그 곳에 웅현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 백제의 거열성·거물성·사평성·덕안성의 백제 잔적을 정벌하였다.
이 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중심 인물은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과 승려인 도침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을 공격해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의 증원병과 연합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 지수신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마저 정복함으로써 백제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665년 백제 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 부여 융과 화맹을 맺었다.


2) 고구려 정벌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위하던 해 당나라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 한편,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진주 등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호응하였다.
대동강을 통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소정방의 당군이 연개소문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자, 662년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군량까지 보급하게 했으나 소정방은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한림과 삼광을 당나라에 보내 군사를 청해 667년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부여성 등 여러 성을 차례로 공격해 쳐부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문무왕도 6월 김유신·김인문·김흠순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나라 진영에 파견해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9월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3) 고구려 잔적 정벌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고구려 유민의 항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부흥 운동 중에서도 특히 수림성 사람으로 대형인 검모잠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맞이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70년 안승은 검모잠을 죽인 다음 4,000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에 봉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부흥 운동도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4) 삼국통일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해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5) 당나라와의 항쟁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670년, 품일·문충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격해 빼앗도록 했으며, 그 곳의 인민을 신라의 영토로 옮기고, 천존 등은 7성을, 군관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671년, 죽지 등이 가림성을 거쳐 석성 전투에서 당군 3,5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당나라의 행군총관 설인귀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 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해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해 아찬 진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 척을 공격해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 온 당군과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672년,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대군을 동원해 침략해 옴으로써 신라는 한강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군과 여러 차례 싸워야만 하였다.
674년, 당나라는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침략해 옴과 동시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에 봉해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675년,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 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 장군 문훈이 이를 격파해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000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이근행이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는데 신라군이 매초성에서 크게 격파해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 시득이 지벌포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676년,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왕권 안정화 노력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 문왕을 비롯한 문훈·진복·지경·예원·천광·춘장·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 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지경·예원 등 자기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행정업무 정리
671년과 672년에 병부·창부·예부·사정부 같은 중앙 관부의 말단 행정 담당자인 사의 인원 수를 증가시켜 업무 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8) 5소경제 기틀 마련
지방 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 대에 이미 소경을 설치한 중원에 성을 축조했으며, 통일 후인 678년에 북원소경을, 680년에 금관소경을 두어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9) 9서당과 10정 설치
삼국통일 후 신라 군사 조직의 기간은 신라 민과 피정복 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이었다.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은 문무왕이 백제 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 해인 672년에 백제 민으로써 조직한 것이다.


10) 장창당, 비금서당 설치
672년 장창당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에 비금서당이 되었다. 이로써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 대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11) 5주서 설치
672년에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