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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태종무열왕]집사부, 중시, 상대등, 소정방, 김유신, 계백, 황산벌전투의 주인공 김춘추

[한국사-태종무열왕]집사부, 중시, 상대등, 소정방, 김유신, 계백, 황산벌 전투의 주인공 김춘추

 

 

1. 생애: 602~661년


2. 재위기간: 654년~661년


3. 휘: 김춘추


4. 묘호: 태종, 시호: 무열, 왕호: 왕


5. 신상정보
출생일: 602년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661년
매장지: 무열왕릉(경주시 서악동)
부친: 문흥왕 김용춘
모친: 천명공주
배우자: 문명왕후 문희, 영창부인 보희, 보라공주 설씨
자녀: 12남 2녀 이상

 

[EBSi 5분사탐 한국사, 태종무열왕]
[KBS1드라마 대왕의꿈, 태종무열왕]
[KBS1드라마 대왕의꿈, 태종무열왕]]
[MBC드라마 선덕여왕, 김춘추]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 25대 왕 진지왕의 아들 이찬 김용춘과 26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 김씨 사이에서 탄생.
2)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이찬 알천의 추대로 신라 제29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진지왕계와 금간가야계의 결합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을 이루었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 군주 김구해계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 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2) 친당정책
648년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 시대 전기간을 통해 계속 사용해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3) 신귀족세력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해 신장된 신귀족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4) 왕권의 전통성 확립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 정치를 강화하였다.


5) 왕권 강화 및 안정화
655년에 원자 법민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 집사부 중시 권한 강화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신라 중대 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7) 고구려에 대한 전쟁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연합해 신라 북경 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과 소정방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8) 백제 정벌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 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 13만 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천존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 공격을 응원하였다.


9) 황산벌 전투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 통일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