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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진평왕] 위화부, 건복, 호국불교, 수나라, 당나라, 진평왕릉의 주인공

[한국사-진평왕] 위화부, 건복, 호국불교, 수나라, 당나라, 진평왕릉의 주인공

 

 

1. 생애: 567~632년


2. 재위 기간: 579년~632년


3. 휘: 김백정


4. 묘호: 없음, 시호: 진평, 왕호: 왕


5. 신상정보

 

[KBS1드라마 대왕의꿈, 진평왕]

 

 

[MBC드라마 선덕여왕, 진평왕]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릉]

 


출생일: 567년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632년
매장지: 진평왕릉(경주시 보문동)
부친: 동륜태자
모친: 만호부인
배우자: 마야부인
자녀: 1남 2녀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24대 진흥왕과 맏아들 동륜태자와 진흥왕의 누이인 만호부인 김씨 사이에서 탄생.
2)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폐위되어 죽은 뒤 신라 제26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왕권강화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이것은 관제의 정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즉위하던 해 8월에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해 일체의 국정을 맡겼다.
580년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중앙관부 설치
581년에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를 관장하는 조부를 설치하고 조부령 1인을 두었다. 같은 해에 또 거승을 관장하는 승부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다.
591년에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 2인을 두었다.
여기서 진평왕대 초기인 580년대에 위화부·조부·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관부가 설치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3) 관부정치체제 전환
진평왕 집권 시기는 신라의 관제 발달 사상 발전기로 새로운 행정 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함으로써 조직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정치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4) 내성 사신 설치
622년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에 대감 6인, 상사서와 대도서에 대정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5) 건복
584년에 건복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6) 수나라 외교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7) 호국불교
진평왕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과 귀국행이 빈번하게 있었다.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 행차와 같이 이뤄지고 있어서 불교 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8) 고구려 및 백제의 침입
진흥왕대의 고구려·백제지역에 대한 영역 확장 결과, 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양국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으로 공격해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침입해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여,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 해에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9) 당나라 외교
618년에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렇게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인해 당나라에 대한 외교 통로가 막히게 되었음을 호소하였다.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