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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진흥왕] 진흥왕순수비, 관산성전투, 거칠부, 화랑도, 창녕비, 북한산비를 만든 왕

[한국사-진흥왕] 진흥왕순수비, 관산성전투, 거칠부, 화랑도, 창녕비,MBC드라마 선덕여왕, 진흥왕 북한산비를 만든 왕

 

 

1. 생애: 534~576년


2. 재위기간: 540년~576년


3. 휘: 김삼맥종, 김심맥부


4. 묘호: 없음, 시호: 진흥, 왕호: 왕


5. 신상정보

 

[MBC드라마 선덕여왕, 진흥왕]
[KBS2 드라마 화랑, 진흥왕]
[진흥왕릉,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

 

 

[진흥왕의 대외정복 활동 지도]
[국보 제 3호, 북한산 순수비]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경주
사망일: 576년
매장지: 법흥왕릉(경주시 서악동)
부친: 입종 갈문왕
모친: 지소태후
배우자: 사도왕후
자녀: 2남 이상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23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법흥왕의 딸인 김씨 사이에서 탄생.
2) 540년 백부이자 외조부인 법흥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제24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연호 변경
551년 개국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 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3개나 사용하였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572년의 홍제가 그것이다.


2) 백제 성왕과 연합한 한강 탈환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으로 임명된 이사부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 하류 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유역을 탈환하였다.
진흥왕은 거칠부를 비롯해 구진·비태·탐지·비서·노부·서력부·비차부·미진부 등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3) 한강유역 차지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해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초대 군주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 맺은 결혼 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 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해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4) 중국 남조.북조 외교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5) 가야 정복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해 낙동강 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 비사벌에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와 비화가야 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후에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백제의 신라 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 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6) 신라 최대의 영토 차지
고구려·백제·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 있는 4개의 순수관경비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가 말해주고 있다.

 

 


7) 진흥왕 순수비
4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되었다.
그러나 북한산에 세워졌던 북한산비는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 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8) 국사 편찬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 편찬에 관계한 이사부와 거칠부가 모두 내물왕계 후예라는 점과 당시 왕족의 혈연 의식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국사>에는 중고왕실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해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9) 불교 숭상
544년, 흥륜사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해 봉불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549년,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553년,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로 삼았다.
565년, 승려 명관이 불경 1,700여 권을 진나라에서 가져왔다.
566년, 황룡사를 완공하였다.
572년, 7일 동안 팔관연회를 외사에서 열어 정복전쟁 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576년, 안홍법사가 능가승만경 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가져왔다.


10) 화랑도 창설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왔던 여성 중심의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유명한 화랑이 었다는데서도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