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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성덕왕] 정전지급, 성덕왕릉, 누각전 호국불교를 실행한 왕

[한국사-성덕왕] 정전지급, 성덕왕릉, 누각전 호국불교를 실행한 왕

1. 생애: 생년미상~737년


2. 재위기간: 702년~737년


3. 휘: 김흥광, 김융기


4. 묘호: 없음, 시호: 성덕, 왕호: 왕


5. 신상정보

[관문성]
[성덕왕릉]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737년
매장지: 신문왕릉(경주시 정래동)
부친: 신문왕
모친: 신목왕후 김씨
배우자: 성정왕후, 소덕왕후(점물왕후)
자녀: 4남 1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 31대 왕 신문왕과 신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탄생.
2) 702년 친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제32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고독한 삶
효소왕이 사망하자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704년 소판 김원태의 딸과 혼인하였으나(성정왕후 혹은 엄정왕후), 외척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잠재우기 위하여 716년 왕후를 궁궐에서 내보내야만 했다.
왕후가 궁궐에서 나간 이후 곧바로 태자의 사망을 보아야 했다. 이후 성덕왕은 720년 이찬 김순원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다(소덕왕후).
그렇지만 계비가 724년 12월 죽자 성덕왕은 그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가까운 세월을 왕비 없이 고독한 삶을 이어 나갔다.


2) 집사부 중시 권한 강화
통일신라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성덕왕 대에는 효소왕 때부터 활동하던 이찬 김개원을 비롯해 인품·배부·사공의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3) 민생안정
정치의 성패가 일선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자질이나 복무자세 여하에 달려 있음을 인식한 그는 백관잠을 지어 관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타일렀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교서를 내려 백관들로 하여금 북문에 들어와 진언하도록 언로도 개방하였다.
이와 같이 왕은 관료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한편 직접 민정 시찰에 나서 주·군을 자주 순행하였다.
또한 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죄인에 대한 사면조치를 단행하였는데, 그 빈도는 역대 제왕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4) 정전 지급
자영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근본 대책으로 당의 균전제를 본떠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백성들의 사실상 사유지였던 전답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자영농민을 법제상으로 보호하려는 조정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5) 축성 사업
국방문제에 있어 빈틈없이 대비하였는데, 전국의 요충지에 성을 쌓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를 위해 732년 제1급 중앙 관부로 경성주작전을 설치하고 도성의 방비태서를 강화하였다.


6) 당나라와의 대외 관계
왕은 재위 36년간 46회의 견당사를 보냈으며 유학생도 보내어 국학에서 유학을 배우도록 조치하였다.
그런 가운데 732년 발해 군대가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 등주를 공격하게 되자 당과 혈맹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과 같이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여 김유신의 손자로서 왕의 총신이었던 김윤중과 적잖은 병사를 파견하였다.
비록 큰 눈이 내려 길은 막히고 얼어 죽은 병사가 절반이나 되어 도중에서 회군하고 말았지만, 이에 당으로부터 735년 패강 이남의 지경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7) 일본과의 대외 관계
735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며 이름도 왕성국으로 고쳤다고 자부했다.
이는 신라 조정의 높아진 자존의식을 표현한 것인데, 일본이 이에 대하여 거부감을 드러냈고 결국 성덕왕이 죽을 때인 737년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 침공의 논의가 나오기까지 했다.


8) 유교 예제 정비와 국가 불교 고취
717년 당에서 귀국한 김수충이 공자 이하 10 철과 72 제자의 도상을 가져오자 왕은 이를 국학에 안치토록 조치하였다.
또한 718년에는 누각전을 설치하였고, 721년에는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종사할 요원 양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제도 정비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교적 예의에 입각하여 각종 예제를 정비한 것이다. 유교사상과 의례를 강화함으로써 가까스로 확보한 평화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9) 호국불교
성덕왕이 전광대왕이란 불교식 왕명을 가진 중대 유일의 군주였던 것만 보더라도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즉위한 이후 증조부인 태종무열왕을 추복 하고 겸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국가의 안태를 기원할 목적으로 봉덕사 건립에 착수, 7일 동안 인왕 도량을 베풀었으며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이는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찰 가운데 하나로 성전사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