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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경덕왕] 경덕왕릉, 김사인, 불국사, 석굴암, 봉덕사,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게 한 왕

[한국사-경덕왕] 경덕왕릉, 김사인, 불국사, 석굴암, 봉덕사,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게 한 왕

 

 

1. 생애: 생년미상~765년


2. 재위 기간: 742년~765년


3. 휘: 김헌영


4. 묘호: 없음, 시호: 성덕, 왕호: 왕


5. 신상정보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문양]
[경덕왕릉]

 


출생일: 생년 미상
출생지: 신라 서라벌
사망일: 765년
매장지: 경덕왕릉(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부친: 신문왕
모친: 소덕왕후 김씨
배우자: 삼모부인, 서불한 김충의 딸 만월부인 김씨(경수왕후 혹은 경목왕후)
자녀: 4남 1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 34대 왕 성덕왕과 소덕왕왕후 김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탄생.
2) 친형이 효성왕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왕제로서 태자가 됨.
3) 752년 효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35대 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관제 정비와 개혁조치
경덕왕은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 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개혁정치의 주역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에서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였다.
744년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래, 대정·조량·김기·염상·김옹·김양상 등 7인이 중시를 역임하였다.
특히, 747년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변경하고,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 교육을 진흥시켰다.
748년에는 정찰 1인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게 함으로써,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밖에도 749년에는 천문박사 1인과 누각박사 6인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 정비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면서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김사인의 비판
경덕왕의 한화정책 추진은 745년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된 김사인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756년 상소를 통해, 근년의 빈번한 천재지이를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경덕왕에 의해 추진되던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김사인의 비판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757년 병을 이유로 상대등에서 물러났다. 대신 왕의 측근인 이찬 신충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3) 한화정책
757년부터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지방 9개 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 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 중심의 한화적 개혁정치는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재강화해 연장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이었으나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혜공왕 때에 이르러서는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4) 외교관계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는, 재위 동안 전통적인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즉위하던 해와 753년에 일본의 사신이 이르렀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5) 녹읍 부활
757년 내외 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6) 귀족 세력의 성장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전제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재강화에 실패한 전제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불교 중흥
경덕왕은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굴불사를 비롯하여 영흥·원연·불국 등의 절을 세웠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 2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