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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헌강왕] 신홍, 처용, 처용가 탄생 배경의 왕

[한국사-헌강왕] 신홍, 처용, 처용가 탄생 배경의 왕


1. 생애: 생년미상~886년


2. 재위기간: 875년~886년


3. 휘: 김정


4. 묘호: 없음, 시호: 헌강, 왕호: 왕


5. 신상정보


[처용]
[처용문화제]

[헌강왕릉: 경주시 남산동 소재]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서라벌
사망일: 886년
매장지: 헌강왕릉(경주시 남산동)
부친: 경문왕
모친: 문의왕후 김씨
배우자: 의명부인, 의명왕태후
자녀: 1남 2녀


6. 출생 및 즉위 과정
1) 신라의 제48대 경문왕과 47대 헌안왕의 딸인 문의왕후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탄생.
2) 경문왕 6년, 866년에 태자로 봉해짐.
3) 875년 경문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제 49대왕으로 즉위함.


7. 주요 업적 및 삶
1. 국학 진흥
헌강왕은 즉위한 뒤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국학 진흥활동은 경문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헌강왕대에 이어진 것이다.
이를 통하여 국학에 적극적이었던 6두품 신분층의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또한 국왕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다.


2. 불교 진흥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해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다.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해 문신들로 하여금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3) 신홍의 반란
879년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곧 진압하였다.
880년 왕이 월상루에 올라 경주의 사방을 바라면서, 백성들의 지붕은 볏짚이 아닌 기와로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때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에 국한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 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4) 어무상심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했을 때였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이 춤을 '어무상심'이라 한다.


5) 지리다도파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라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6) 처용가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처용가」가 만들어졌다. 이 처용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이슬람 상인이나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경문왕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화랑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7) 보로국과 흑수국
886년 봄에 적국인 보로국(지금의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과 흑수국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니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