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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한국사-고이왕] 율령반포, 6좌평 16관등제로 국가의 기틀을 다진왕, 고이왕의 업적

[한국사-고이왕] 율령반포, 6좌평 16관등제로 국가의 기틀을 다진왕, 고이왕의 업적

 

 

1. 생애: 생년 미상~286년


2. 재위기간: 234년~286년


3. 휘: 부여고이


4. 묘호: '없음'


5. 신상정보

 

[백제-고이왕]

 

[백제 고이왕- 중앙 관등제]
[백제 고이왕-6좌평]

출생일: 생년미상

출생지: 확인불가

사망일: 286년

매장지: 확인불가

부친: 개루왕

모친: 자료없음

배우자: 자료없음

자녀: 2남 이상


6.출생 및 즉위 과정

 

1) 출생은 생년 미상으로 확인불가.

2) <삼국사기>에는 백제 제4대왕 개루왕의 서자로 기록되었으나,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음.

3) 제6대 구수왕이 죽은 뒤 장자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백제의 제8대 왕으로 즉위.


7. 주요 업적 및 삶

 

1) 고이왕에 대한 다양한 해석

<삼국유사>에서 고이왕을 '초고왕모제'라고 한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해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비류계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일본의 사서 <신찬성씨록> <일본서기>등 에는 구이.고모로 이름이 적혀있다.


2) 고대국가의 기틀 마련

고이왕은 즉위 후 국가 체제의 정비와 집권력의 강화에 주력해 백제를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져 놓은 인물이다.

집권력의 강화를 위해 좌장을 설치, 내외 병마권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족장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3) 중앙 관등제 마련

260년 고이왕은 지배 체제의 정비를 위해 '중앙 관등제'를 마련하였다. 고이왕 때의 중앙 관제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이른바 '6좌평.16과등제'가 고이왕 27~28년에 완비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중앙에서의 이와 같은 관등제 설치는 백제의 지배층에 편입된 대소 족장 세력들을 체계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만큼 집권적인 지배 체제와 권력 장치가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4) 율령반포 및 범장지법 제정

율령반포와 동시에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3배를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케 함으로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다.


5) 농업장려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장려 하였다.


6) 마한과의 관계

마한과의 관계에서는 직산에 자리잡은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해 이전의 부용관계를 청산하고 한강 유역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의로 위치를 확립하였다.


7) 낙랑군.대방과의 관계(백제와 중국 군현 관계 변화)

고이왕 이전까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자세에서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246년 위나라가 낙랑군과 삭방과 합공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침입하였다.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에 백제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이왕때는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중국 군현의 이이제이적인 기미책에서 벗어나 중국 군현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8) 남당 설치

남당은 정사를 논의하고 행정사무를 처리 집행하는 정청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이왕은 고대의 정청으로서 왕위와 신위가 뚜렷하게 구분된 남당을 설치해 국정을 듣고 결정함으로써 지배권력과 권위를 더욱 과시할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제왕조실록, 위키페디아 참조]